제가 영상 관련 일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20년이 지났습니다. 나름 열심히 작업을 한 덕에 꽤나 많은 작품에 참여했더군요. 그 동안 일한 시간을 돌이켜보면 다양한 이유로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생긴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Tim Reckart 감독의 단편 <Head Over Heels>도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사실 제 작업 원칙을 바꿔가면서까지 참여한 작품이었는데, 그 결과가 참 좋아서 놀랐더랬죠. 제게는 애니상 수상작의 스텝, 그리고 칸느와 아카데미 경쟁부문 후보작의 스텝이라는 크레딧을 달아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풀버전이 얼마 전 온라인 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작품은 영국국립영화학교(NFTS, National film and television school)의 석사과정 졸업작품입니다. NFTS는 칸느나 아카데미상의 단편 경쟁부문에서 프로들과 수상 경쟁을 벌이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학교 중 하나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아드만 스튜디오 소속 닉 파크 감독의 <Wallace and Gromit>은 원래 이 학교의 졸업작품이었습니다.

NFTS의 졸업작품은 교내 각 세부전공이 연계된 연합 프로젝트로 진행됩니다. 영화학교이기에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하나의 단편 프로젝트가 구성되면, 각 전공의 졸업 준비생들이 참여해 협업으로 프로젝트를 꾸려나가죠. 프로젝트에 필요한 관련 전공이 교내에 없을 경우에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합니다. 저도 영국 스튜디오의 추천을 통해 그렇게 스텝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스톱모션용 뼈대 제작자인 김우찬 감독의 아카데미상 후보 참여작

 

<Head Over Heels>는 애정이 식은 부부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감독은 부부의 심리적 거리감과 단절된 관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남편과 아내의 물리적 공간을 위아래로 분리했는데, 이는 참으로 신선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등 속에서 생기는 갖가지 해프닝과 화해의 과정을 섬세한 애니메이팅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디즈니의 단편 <Paperman>에 밀려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선을 드러내기 위해 손짓이나 눈 깜박임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감독의 디렉팅은 아카데미상 후보작에 오른 다른 프로들과도 견줄 만한 실력이었습니다. 또한 이야기꾼으로서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볼거리는 조명입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조명 사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적절한 빛을 사용해 명암 대비가 이뤄진 집의 내외부, 그리고 야외 및 일몰의 표현은 약간의 깜박임도 애교로 봐줄 수 있을만큼 훌륭합니다. 조명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다시보기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오랜만에 우리 일상을 소재로 한 스톱모션을 다뤄서 그런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그 중 하나는 보편적인 감성을 담은 일상적 이야기가 강한 메시지 전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기에 화려한 듯하지만 어설프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실험적 기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보다는 <Head Over Heel> 같은 작품이 훨씬 비범해 보입니다. 인형이니 장비니 기법이니 하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현실에 있을 법한 스토리만으로도 한 편의 좋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게 애니메이션의 가장 원초적이고 태생적인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