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러시아에 있는 오랜 친구가 안부와 함께 사진 몇 장을 보내왔습니다. <플라스티신 알파벳>이라는 작품이 러시아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사진이었죠. 페스티벌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제 친구는 이 작품에 대해 아낌없는 칭찬을 덧붙였습니다.

<플라스티신 알파벳>은 근래에 보기 드문 클레이를 사용한 작품으로 러시아 알파벳 습득을 위한 유아용 애니메이션입니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다고 보기엔 아트 디렉션이나 구성이 웬만한 단편 작품을 뛰어넘는 수작이죠. 기본적인 제작방식으로 부조 형식이 사용되었고, 여기에 클레이 퍼펫과 멀티플레인 기법으로 3차원적인 공간감을 가미한 듯합니다. 이런 복합적인 기법을 사용한 덕에 기존 부조 방식과는 다르게 독창적이면서도 신선한 시각적인 느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다른 매력은 친근하고 감성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모국어의 글자를 처음 접하는 아이들을 위해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를 담은 요소를 곳곳에 배치한 점도 마음에 듭니다. 교육용 애니메이션의 목표를 잊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부조 형식’의 애니메이션을 편의상 ‘2.5D 스톱모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부조 형식이 친근한 이유는 이게 애니메이션 역사 초창기부터 꾸준히 사용되어온 오랜 제작방식이기 때문일 겁니다. 유리 놀슈테인, 이지 트릉카, 포야르 등 여러 거장들의 작품도 이러한 친근함에 일조했구요. 부조 형식은 아마도 애니메이션 초기에 관객의 눈에 익은 2차원적인 드로잉을 3차원으로 옮기면서 나타난 방식, 혹은 인형이나 오브제를 이용한 3차원적인 제작방식을 회화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로 이해됩니다.

최근 러시아의 전설적인 스튜디오 ‘소유즈뮬트’에서 일하던 친구와 메신저를 하던 도중 제작환경이 예전 같지 않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 세계적으로 명성이 드높던 러시아 애니메이션 업계가 공산체제 붕괴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도 여기저기서 들려오구요. 그렇지만 쉽지 않은 제작환경에서도 거장과 신진 작가들의 개성 넘치는 작품이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서 러시아 애니메이션 업계의 밝은 미래를 예상해 봅니다. 특히 오늘 올린 작품과 같이 작가의 색깔이 듬뿍 담긴 상업물을 보면 더욱더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용어 : 플라스티신 (Plasticine)  1897년 영국의 미술교사 윌리엄 허버트가 만든 합성 클레이. 굳지 않아 모델용으로 주로 사용.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에서는 ‘클레이’라고 말하면 ‘플라스티신’을 지칭한다.